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면, 언젠가 더 많은 시간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시간을 맡아준다는 은행
1973년에 발표된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는 이상한 은행이 등장합니다.
돈이 아니라 시간을 맡아준다는 ‘시간 저축 은행’입니다.
이 은행의 직원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회색이었습니다. 회색 옷을 입고, 회색 모자를 쓰고, 작은 회색 시가를 피웠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만났다는 사실조차 곧 잊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발소를 찾아온 회색 신사
어느 비 오는 날, 회색 신사 한 명이 이발사 푸지 씨의 가게를 찾아왔습니다.
푸지 씨는 작은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손님의 머리를 다듬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의 일에도 제법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모든 것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평생 이 작은 가게에서 일만 하다가 끝나는 것은 아닐까. 제대로 된 삶을 살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닐까.
바로 그때 회색 자동차가 가게 앞에 멈췄습니다.
차에서 내린 회색 신사는 이발 의자에 앉더니 자신을 시간 저축 은행의 직원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는 회색 분필을 꺼내 가게 거울에 숫자를 적기 시작했습니다.
푸지 씨가 지금까지 잠을 잔 시간, 밥을 먹은 시간,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시간, 친구를 만난 시간까지 모두 초로 바꿨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책을 읽고, 창가에 앉아 하루를 돌아본 시간도 계산에 들어갔습니다.
회색 신사의 계산에서는 그 시간이 모두 ‘낭비’였습니다.
거울을 가득 채운 숫자의 마지막에는 남은 시간이 0이라고 적혔습니다.

시간을 아끼기 시작한 푸지 씨
푸지 씨는 자신이 엄청난 시간을 허비했다고 믿게 됐습니다.
회색 신사는 지금부터라도 시간을 아껴 은행에 맡기면 나중에 이자까지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방법도 알려주었습니다.
손님 한 명에게 쓰는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고, 쓸데없는 대화를 하지 말 것.
어머니를 만나는 횟수를 줄이고, 친구와 노래하고 책을 읽는 일도 그만둘 것.
가게에는 정확한 시계를 걸고, 직원의 움직임도 분 단위로 확인할 것.
푸지 씨는 그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회색 신사가 떠나자 거울에 적힌 숫자도 사라졌습니다. 푸지 씨는 누가 찾아왔는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만은 자신의 결심처럼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첫 손님이 들어오자 푸지 씨는 꼭 필요한 일만 했습니다.
전에는 30분이 걸렸던 일을 20분 만에 끝냈습니다. 손님과 나누던 이야기도 멈췄습니다.
직원을 더 고용하고, 모든 움직임을 정해진 시간에 맞췄습니다.
일은 전보다 빨라졌고 더 많은 손님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푸지 씨에게 남는 시간은 없었습니다.
하루는 더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한 주가 사라지고, 한 달과 일 년도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습니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낄수록 그는 더 서둘렀습니다. 더 서두를수록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도시 전체로 번진 시간 저축
푸지 씨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시의 다른 사람들도 시간 저축을 시작했습니다.
오래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대화를 짧게 끝냈습니다. 식당에서는 천천히 머물던 손님이 사라졌고, 아이들과 함께 놀아줄 어른도 줄었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가장 빠르고 알찬 방법을 찾았습니다. 잠시 조용해지면 시간을 버리고 있다는 불안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더 빨라졌지만 더 바빠진 사람들
사람들은 전보다 빠르게 일했고 더 많은 일을 처리했습니다.
그런데도 누구나 바쁘다고 말했습니다. 서로를 기다려줄 시간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아껴둔 시간은 어디에도 쌓이지 않았습니다.
시간 저축 은행은 사람들에게 그 시간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회색 신사들은 빼앗은 시간으로 살아가는 시간 도둑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언젠가 제대로 살기 위해 오늘의 시간을 아꼈습니다.
그러나 그 ‘언젠가’를 기다리는 동안, 오늘의 삶은 점점 빠르고 메말라갔습니다.
우리도 시간이 부족하면 가장 먼저 일정을 빽빽하게 채우곤 합니다.
쉬는 시간을 줄이고, 여러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하나라도 더 끝내야 하루를 잘 보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빠르게 끝낸 일의 수만으로는 오늘 중요한 일을 제대로 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꼭 만나야 할 사람과의 약속, 충분히 생각해야 할 업무, 다음 일을 위해 남겨야 할 기록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할 일을 적어두면 빈 시간을 찾아 채우는 것뿐 아니라, 무엇에 시간을 먼저 내어줄지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모모』의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느라 정작 자신이 시간을 쓰고 싶었던 곳을 잊었습니다.
오늘의 일정을 바라볼 때, 가장 빨리 끝낼 일보다 가장 놓치고 싶지 않은 일을 먼저 찾아보면 어떨까요?
ILJI TIME STORIES · 09



